사도세자의 두 얼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뒤주에 갇히기 전 연쇄살인마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세자의 두 얼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기대와 노론 세력의 모함 때문에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왕자. 우리는 흔히 그를 ‘피해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죽어야 했던 진짜 이유가 단순히 ‘정치 싸움’ 때문이었을까? 역사의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조가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섬뜩한 이유가 드러난다.
그것은 사도세자가 궁궐 안에서 내관과 궁녀, 심지어 무고한 사람들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다닌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로열 패밀리 연쇄살인마’였기 때문이다.

사도세자, 기록된 희생자만 100여 명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남편의 광기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세자의 살인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내관 살해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거나 옷을 잘못 입혀줬다는 이유로 내관 김한채를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죽인 내관의 목을 잘라 들고 들어와 아내인 혜경궁 홍씨와 궁녀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하듯 전시했다는 점이다.
무차별 폭행
후궁들을 몽둥이로 때려 피투성이로 만들고, 우물에 빠뜨려 죽이려 하기도 했다.
혜경궁 홍씨는 기록한다. “세자가 죽인 내관과 나인(궁녀)이 100여 명에 이르고, 불에 지지거나 다쳐서 병신이 된 자는 셀 수도 없다.”
이것이 과연 정치적 모함으로 조작된 기록일까? 안타깝게도 <영조실록>에도 영조가 세자에게 “네가 때려죽인 궁녀가 여럿이라지?”라고 꾸짖는 대목이 분명히 나온다.
사도세자의 병: 의대증(衣帶症)
그는 도대체 왜 미쳐버린 걸까? 물론 아버지 영조의 가혹한 조기 교육과 정서적 학대가 원인이었다. 숨 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사도세자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의대증’이었다.
옷(衣)을 입는 것 자체에 공포를 느끼는 강박증이었다. 그는 옷 한 벌을 입기 위해 수십 벌의 옷을 찢어발기거나 불태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시중드는 궁녀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발작을 일으키며 칼을 휘둘렀다.
옷을 입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아버지 영조를 만나러 가는 ‘스트레스’였고, 그 스트레스를 만만한 아랫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 풀었던 것이다.
영조의 결단: “이대로 두면 손자(정조)도 죽는다”
운명의 1762년 여름. 사도세자의 광기는 극에 달했다. 그는 칼을 차고 몰래 궁을 빠져나가 평양으로 놀러 가거나, 아버지를 죽이러 가겠다며 하수구(수구문)를 통해 왕의 침전으로 향하려다 발각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사도세자의 친어머니인 영빈 이씨가 남편 영조에게 눈물로 고변한다. “세자의 병이 깊어 바랄 것이 없으니… 대처분을 내리소서. 그래야 세손(정조)이라도 살립니다.”
친어머니조차 아들을 포기할 정도로 사도세자의 상태는 통제 불능이었다. 만약 사도세자가 왕이 된다면? 그는 조선의 네로 황제가 되어 피의 숙청을 벌일 것이 뻔했고, 자신의 아들인 정조마저 죽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영조는 ‘왕조의 보존’과 ‘백성의 안전’을 위해 아들을 뒤주에 가두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 살인마인가, 병든 환자인가?
사도세자는 분명 가정폭력과 아동학대가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아버지 영조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에게 죽임당한 100여 명의 내관과 궁녀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었다.
우리가 그를 동정하는 동안, 역사 속에 묻힌 진짜 피해자들의 비명 소리는 잊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도세자는 ‘불쌍한 왕자’이기 이전에, 멈추지 않는 칼을 휘두른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