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3편, 3번째 국왕인 태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입니다. 왕이 되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긴 했지만, 그래도 조선의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은 왕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후에 세종대왕 시절 조선이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태종의 힘이있었기 때문인데요. 오늘 태종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3대 국왕 태종
태종은 누구일까?
조선의 3대 국왕인 태종은 1367년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사이에서 5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가졌었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누구보다 도왔단 자식이었습니다.
후에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면서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정종을 국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세자로 책봉되게 됩니다. 2차 왕자의 난까지 진압한 태종은 자연스럽게 정종에 이어 조선의 3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즉위 후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힘썼는데요. 피를 흘리고 왕위에 올랐지만 왕위에 오른 뒤에는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왕으로 평가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신하들에게는 엄격했지만 백성들을 해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해요.
태종이 왕이 된 과정
태종이 왕이 되는 과정은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장남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고 8남을 세자로 올리면서 갈등이 벌어졌는데요. 이 과정에서 5남이었던 이방원이 중심이 되어 정도전 등 중심인물과 나머지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이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되었는데요.
사실 바로 왕에 오를 수 있었지만, 피를 흘리며 왕위에 오르는 것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성계의 차남을 왕위에 올리는데 이 왕이 바로 2대 국왕인 정종이 됩니다.
정종은 2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을 가졌는데요. 이 가운데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방원이 다시 승리를 하며 완벽하게 권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태종으로 3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태종의 업적
왕권강화
태종은 왕권 강화에 가장 힘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존경하는 세종대왕이 바로 조선의 4대 국왕인데요. 만약 태종이 왕권강화를 해내지 못했다면 세종 시대에 그렇게 태평성대 할 수도, 또 조선이 번영하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그만큼 태종의 노력과 힘이 있었기에 세종이 더욱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병혁파
태종은 우선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군권을 일원적으로 바꾸며 삼군부에게 주었는데요. 왕자의 난으로 왕까지 올랐던 자신이었기 때문에 사병을 쥐어주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결국 모든 군은 국가의 소속이 되었고 태종의 힘은 더욱 강력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관제정비
1대 왕인 태조 시절에는 언론 기관들이 제대로 기능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언론 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 대간과 사관 등에게 힘을 상당히 실어 주었다고 합니다. 간언하는 존재들을 귀찮아하고 싫어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이용하는 방향으로 관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감찰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기관으로 만들었고 의정부가 설치되며 국가 운영 방식의 기본 시스템을 만든 것도 바로 태종의 업적입니다. 특정 기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정부와 6조, 승정원, 대간 등으로 분산시키면서 신하들이 권력을 쥘 수 없도록 편성했습니다.
결국 왕권이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졌죠.
공신, 외척 숙청
태종이 무자비한 군주라고 보여지기도 하지만 사실 굉장히 영리한 왕이었습니다. 실제로 죽인 신료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해요. 철저하게 계획하여 유배를 보내면서 심사숙고를 하는 왕이었습니다.
세자의 권력에 해가 될 것 같은 인물들을 철저하게 물색하여 명분을 찾은 뒤 숙청을 하였는데요. 정말 왕권강화와 다음 왕까지 위한 인물이 바로 태종이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을 도왔던 공신들이라 할지라도 왕권을 위협하는 모습이 보이면 바로 숙청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요.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들은 공신이나 외척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무자비하기보다는 정말 똑똑한 왕으로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전국 행정 정비
태종은 또한 호적 제도를 정비햇습니다. 3년마다 호적을 작성하게 했는데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호패를 소지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관리하고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는데요. 하지만 서얼금고법이라는 것을 두어 서얼 출신들에게는 문과 응시의 기회를 박탈했다고 하네요. 양반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억제한 효과가 있긴 하지만 확실히 신분차별이 있기는 했습니다.
명과의 우호 관계
명을 치러 갔던 요동 정벌에서 위화도 회군을 통해 조선이 건국 되었기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이방원을 친근하게 대했다고 해요. 그런 배경을 통해 태종 시대에는 명나라와 굉장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명나라에 너무 굽힌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태종은 조선의 주권을 위협할 만한 명나라의 주장들은 철저하게 막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리뷰
태종이라고 하면 거칠고 냉정한 이미지라는 생각을 많이 해왔는데요. 알아보니 그 누구보다 똑똑하고 단단했던 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정말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실제로 왕권의 강화를 이끌었고 조선이 번영할 수 있도록 기틀을 잡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태종이 있었기 때문에 세종이 있고 이후에 조선의 번영에 큰 기틀을 마련해준 왕을 넘어서, 이제는 정말 똑똑하고 영리했던 왕이라는 이미지도 추가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왕이 되는 과정은 험난했지만, 그 험난함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지는 않았던 태종이었습니다.